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9.28 서울 수복 (문단 편집) === 영등포 시가전 === 경인가도 남쪽으로 향했던 미 해병대 1사단 1연대는 한강을 건너기 전 '''[[영등포]]에서 적의 완강한 저항을 받게 되는데 이 때가 9월 20일이었다.'''[* 영등포는 일제시대에 와서야 서울로 편입되어 개발된 지역으로써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영등포 토박이들은 서울과 영등포를 구분하는 독자의식이 있었다고 한다.] 영등포 점령에 나선 미 해병대는 포병대와 항공기의 맹폭을 하루 내내 지원받았으나, 북한군의 저항은 필사적이었다. 다음 날인 9월 21일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영등포 서북측(현재의 [[양평동]], [[당산동]] 방면)과 서남측(현재의 [[문래동]] 방면)을 향해 각각 호킨즈 대대와 사타 대대가 공격을 진행하였으나 별로 진전이 없었다. 호킨즈 대대는 안양천을 건너지도 못했으며, 사타 대대는 영등포 남쪽 고지에서 받는 포격으로 인해 [[안양천]]을 건너는 데만 85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그러나 시가 중심부에서는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1선 독려를 돌고 있던 호킨즈 중령이 영등포 적진지를 상세히 정찰해 보았더니 시가 중앙부(현재의 영등포 로터리)에 북한군이 거의 배치가 되어있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됐다. 호킨즈 중령은 예비병력인 에이블 중대로 하여금 그 틈을 찌르게 하였다. 에이블중대는 돌격태세를 갖추어 쏜살같이 영등포 중앙부를 향해 약 600미터 정도 진입하여 중앙 십자로(현재의 [[영등포구청]] 사거리)에 다다른다. 이 과정에서 중대는 한 발의 총격도 입지 않았고 정찰한 결과대로 시내에는 한 사람의 북한 병사는 물론 민간인도 없었다. 에이블 중대원의 증언에 따르면 중대의 좌우 후방에서는 격심한 총성이 나고 있는 반면 '''영등포 중심부는 죽음의 거리처럼 조용하여''' 오히려 기분이 나쁠 정도였다고 한다. 좌우후방의 총포성은 전혀 약해지지 않았음에도 호킨즈 대대장은 에이블 중대에 "개의치 말고 계속 진격하라"고 명령하였고, 중대장은 잠시 북한군의 함정이 아닐까 의심하였으나, 명령이 있기에 동쪽으로 계속 밀고 나갔다. 중대는 서울 방면에서 구보로 증원해 온 수십 명의 북한 병사를 매복하여 기다렸다가 궤멸해 버린 후 정오 경에는 영등포 시가의 동쪽 끝에 진출한다. 그곳에는 경부국도가 동서로 뻗어 있었으며, 중대는 이 도로 제방에 진지를 구축했다. 남쪽으로는 영등포 시가 중심부, 북쪽으로는 [[여의도]]가 내려다보이는 이 곳에서 [[진지]]공사를 하면서 병사들은 북한군의 공격이 있을까 가슴을 졸이며 기다렸으나 북한군은 시가지 양단의 전투에 몰두하여 전혀 눈치채지 못하였다. 오후 늦게 북한군 소부대가 정찰적 공격을 해왔으나 어렵지 않게 격퇴했으며, 이때 진지 남쪽 300미터 정도에 있었던 북한군 탄약고를 폭파해 버렸다. 저녁 무렵에는 5량의 [[T-34-85|T-34]] 전차가 시가 중앙 쪽에서 나타나 진지에 공격을 가했으나, 이 때 나머지 보병들은 개인호에 엄폐하고 [[바주카]]병들만 응전하여 2량을 완파, 2량을 반파시켜 격퇴한다. 밤부터는 북한군의 [[야습]]이 개시된다. 총 4차례에 걸친 야습이 있었으나 그 때마다 중대는 화력을 집중하여 격퇴했으며 특히 4회째에는 진지 앞 10미터 정도까지 유인한 뒤 일제사격을 가하여 북한군의 피해가 막심했다. 북한군이 민간인 가옥 뒤에 숨어 5회째의 야습을 준비하고 있을 때 웹 하사가 몰래 접근하여 훈시 중인 지휘관을 [[저격]]한다. 5차 야습은 함성을 지르는 것만으로 끝났다. 날이 밝고 보니 북한군은 퇴각하였으며 제방 진지 앞에는 275구의 시체가 흩어져 있었다. 1연대는 그것으로 영등포 점령을 완료하였다. 한편 미 육군 7사단 32연대는 영등포의 남쪽, 현재의 [[관악구]]/[[구로구]] 일대의 북한군을 완전히 소탕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